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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선 성자, 죽어선 시대의 정신 (2010년 9월호)
 글쓴이 : 관리자
 

순교 60주년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숨결을 따라가다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관 내부

전남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 ‘애양원’은 평화로웠다. ‘사랑의 성자’ 고(故) 손양원 목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손양원 목사가 나환자(한센병)들의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던 사랑의 성지이며, 두 아들을 총살한 좌익 학생을 아들 삼기로 작정한 곳. 6·25 때도 나환자들을 떠나지 않고 이곳을 지키다 검거되었고, 순교의 순간까지 자신을 죽이려는 공산당원을 전도하다 결국 먼저 간 사랑하는 두 아들과 함께 애양원에 안치됐다. 순교의 그날은 1950년 9월 28일, 60년이 흘러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의 대한민국도 사상 대립이 극심했던 당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손양원 목사 순교 60주년을 맞아, 좌우 이념 대립의 비극을 사랑과 용서로 끌어안은 손양원 목사(1902~1950)의 정신을 이 시대의 초석으로 삼고자,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scene #1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순교 전날 손양원 목사는 ‘죽도록 충성하라’(요한계시록 2:10)는 제목으로 마지막 설교를 했다. “충(忠)자는 입 구(口)와 마음 심(心)을 한데 못질해 놓은 글자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려 죽기까지 하려는 신앙이 충성입니다 … 죽도록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애양원은 16만평 넓은 대지 위에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을 비롯, 성산교회(구애양원교회), 순교자 묘지, 애양원 역사박물관 등이 순교 유적지로 조성돼 있다. 순교기념관으로 가는 길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1200여 명의 나환자들이 아픔과 설움을 토해낸 마지막 종착지였다는 사실이 쉽게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나환자들의 눈물, 손 목사의 순교 정신이 뿌리 내린 이곳 애양원은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들이 당시 상황을 대신 증언해 주고 있었다. 60년 전 좌, 우익 사상이 대립하고 사람보다 이념이 중요했던 시대에, 사랑과 용서로 이념의 갈등을 봉합했던 손 목사의 정신이 굽이굽이 소나무 숲과 하늘, 그리고 낮은 바다가 어우러진 풍광 사이로 결연하고 담담하게 흐르는 듯했다. 애양병원을 지나 한참 산길을 타고 올라가면, 손 목사가 시무했던 과거 애양원 교회(현 성산교회)가 위용을 드러내고, 교회 뒤쪽 둑길을 따라 700m 가량 걸어가면 손 목사 부부와 그의 아들 동인, 동신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아래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현판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이하는 순교 기념관이 등장한다.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은 손양원 목사의 순교 신앙을 전승하고 그가 남긴 유품과 생전 자료를 보관하기 위해 1993년 4월 27일에 개관했다. 연면적 774평에 2개층의 전시관으로 구성돼 있다. 손양원 목사의 생전 사진들을 비롯해 그의 손때가 묻어있는 성경, 찬송, 옥중 편지, 옷가지들과 동인, 동신 두 아들의 책이며 갖가지 소지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60년이란 시간이 흘렀건만, 여전히 손양원 목사의 정신을 본받고 기리고자 하는 방문객들의 발길은 줄을 잇고 있었다.
특히 여름수련회 기간이면 많게는 하루 700~800명의 방문객이 빼곡하게 둘러서서 관람을 하고, 발 디딜 공간조차 없을 정도라고. 기념관을 관리하고 있는 김형찬 장로는 1950년 12월, 손 목사 순교 후 한센병 치료를 위해 애양원에 들어와 현재까지 터를 잡고 있다. 김 장로가 전해 들은 손목사는 키가 작았지만 강단이 있고 설교를 아주 잘했다고 한다. 설교할 때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릴정도였다며,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현재 애양원은 전체 거주자의 1/3 가량이 나환자 출신이다.

scene #2
네 두 오빠를 죽인 그를 내 아들로 삼을 것이니

1948년 10월 27일 여수반란사건으로 좌익 폭도들에 의해 순교당한 두 아들의 장례식장. 흰 두루마기 차림에 누런 두건을 쓴 손 목사는 돌처럼 무거운 입을 열어 전날 작성한 아홉 가지 감사문을 읽어 내려갔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을 나게 하시니 감사.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손양원 목사는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순교한 장남 동인과 차남 동신에 이어 셋째 딸 동희, 동림, 동연, 그리고 넷째 동장과 손목사가 순교하던 날 태어난 막내 동길이다. 갑작스런 두 오빠의 순교 후 당시 16살이었던 손동희 권사(부산 대연중앙교회)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선대부터 물려받은 모태신앙이었지만,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 목사는 언제나 그 표정 그대로, 어떠한 감정의 앙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아들 삼겠다고 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울분이 터져 나왔다. 당시 상황을 손 권사의 시선으로 반추해 본다.



애양원에 두 오빠를 죽인 주동자가 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안재선이라 했다. 그날 오후, 손 목사는 부흥집회를 떠나던 길이었다. “동희야. 네 두 오빠를 죽인 학생이 잡혔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네가 얼른 순천에 계신 나덕환 목사님께 가서 그 학생을 사형장에서 빼내 달라고 부탁해라. 그를 내 아들로 삼을 것이니 그 뜻도 잊지 말고 전해야 한다.” 손 권사는 울면서 악을 쓰고 대들었다. 죽어도 아버지 뜻을 따를 수 없었다. 유별나게 예수 믿는 아버지가 미웠다. “동희야, 두 오빠는 천국 갔으나 두 오빠를 죽인 자는 지옥 갈 것이 분명한데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결국 손 권사는 고집을 꺾고 순천으로 가 나덕환 목사에게 아버지의 뜻을 전했다. 나 목사는 그를 구제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소용없었다. 말이 안되는 소리니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사형장으로 끌려가게 된 안재선. 그를 데려갈 트럭만 도착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순간 나 목사는 손 권사를 떠올렸다. 원수를 구제하기 위해 손 권사는 담당 대령앞에 세워졌다. 그녀의 한마디에 원수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었다. 대령이 물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셔서 여기까지 왔니?”“아버지가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그제서야 참고 참았던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나 목사도 원수 안재선도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울음을 토해 냈다.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두 오빠를 잃은 아픔을 믿음으로 이겨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오빠들을 땅에 묻고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오빠들의 책이며 가방, 교복과 기타 소지품들이 유물이 되어 애양원에 도착했다. 그처럼 꿋꿋하던 아버지가 두 오빠의 교복을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생전 처음 보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홍수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그렇게 손 목사는 아픔을 견뎌내며 원수를 끌어안았다. 말끝마다 “우리 재선이, 재선이”하며 그를 위해 주었다. 손 목사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으면서, 안재선은 확실히 달라지고 있었다. 부산 고려고등성경학교에 입학했고, 주일마다 시장통에서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노방전도에도 열심이었다. 하지만 손 목사 순교 후 결국 신학을 포기한 그는 양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수 앞바다의 무인도에서 양식업을 하다 실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힘겨운 삶을 살다가 48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scene #3
목사가 된 안재선의 아들, 30년 멍에를 지고 애양원을 찾다

최근 안재선씨의 장남 안경선 목사는 손양원 목사 순교 60주기를 앞두고 지난 8월 10일 애양원을 방문했다.(조선일보 2010년 8월 14일자)
“신학교에 가라”는 아버지 안재선의 유언대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소속 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에 입학했고, 현재 성남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언젠가는 꼭 가야지’마음먹었던 애양원, 하지만 자꾸 미뤄 왔던 이유는 손양원 목사님 명성에, 그리고 애양원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목회자가 되어 찾아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아버지 안재선은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족들에게 애양원과 손양원 목사에 대해 단 한마디도 꺼낸 적이 없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사랑의 원자탄’을 관람하게 된 안경선 목사.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영화 속 손 목사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바로 48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둔 아버지의 장례식장이었다. 1979년 12월 19일, 빈소를 지키던 안 목사에게 ‘손양원 목사의 아들 손동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중년의 남자가‘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을 안겨주고 돌아간 이후였다.
그로부터 30년 후 지난 8월 11일, 안경선 목사는 양할아버지 손양원 목사가 순교 직전까지 기도와 예배를 쉬지 않았던 ‘성산교회(구 애양원교회)’강단에서 수요예배 설교를 했다. 전해진 바로는 이날 안 목사는 설교기도 중 눈물을 떨구었으며, 성도들 앞에서 “할아버지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뜻을 이어 앞으로 목회를 더욱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했다고 한다.

scene #4
손양원 목사의 신행(信行)일치와 사랑을 본받자

9월 28일 손양원 목사 순교 60주년을 맞는 기독교계는 요즘 그의 삶과 정신을새롭게 재조명하기 위한 열기로 분주하다. 손양원 목사 순교 60주년 기념예배 및 행사가 올 초부터 전국에서 연이어 마련되고 있고, 9월 28일에는 여수 성광교회에서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 주관으로 기념예배와 강좌가 진행될 예정이다. 전남 여수시는 손양원 목사 유적지를 종교 테마형 관광명소로 조성하고 있다. 2015년까지 총사업비 370억원을 투입해 순교기념관과 손 목사 및 아들 3부자의 묘가 있는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일대 40만㎡에 유적지 조성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념과 지역, 계층 간 갈등으로 얼룩진 이 사회에 손양원 목사가 남긴 신앙과 사랑, 용서와 화해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기 때문이다. 살아선 성자, 죽어선 시대의 정신이 된 손양원 목사, 그는 이 시대에 꼭 기억돼야 할 이름이다.


글_ 여수=참평안 특별취재팀
참고_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손동희 저, 아가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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