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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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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들아! 예수님의 아픔을 어느 정도 아느냐
 글쓴이 : 관리자
 


영원히 멸망 받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막 9:48-49)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하나님 영광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고생과 오해, 말할 수 없는 역경 중에 살면서 누구한테도 대접 받지 못하고, 로마의 극형(極刑)으로 죄인 중에 죄인이 달려 죽을 수밖에 없는 처참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아픔이 어느 정도였습니까? 여러분들이 기독교인이라면 “예수가 나 위하여 십자가 달렸다.”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아침 산보 가듯이, 나들이 가듯이 그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만에 한 가지라도 예수님의 쓰라린 아픔을 느낀다면 우리 신앙생활이 이 정도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사생활 30년, 공생애 3년, 도합 33년간의 지상 생활 가운데서도 이 고난주간이 없었다면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인류의 억조창생들은 비참하고 암담하기 짝이 없는 지옥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 고난주간이 얼마나 귀중합니까. 가는 곳마다 오해요 욕설을 퍼붓습니다. 당시의 대제사장을 비롯한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 유사, 장로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한 제자는 제 갈 데로 가 버리고, 나머지 열한 제자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실 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마 26:38). 그 이면의 아픔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모른다면 성경을 백번 읽어야 허탕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의 아픔을 우리 기독교인들만큼은 깨닫고 고난주간을 지켜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아픔의 최절정이 성경에는 수십 군데 기록되어 있지만 그중에 두 가지만 찾아보면 첫째, 이사야 53장 7절 말씀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누구든 딱 때리면 자신도 모르게 “아얏!” 하고 입이 열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안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묘한 감추인 만나처럼 깊은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 번 열지 않고 참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째, 마태복음 27:46 말씀입니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비명의 절규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아팠으면 “나를 버리신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아픔은 최고의 형벌, 세상에 전무후무한 가장 큰 형벌입니다. 더구나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한꺼번에 당해버리신 형벌입니다. 한 사람이라면 벌떡 지고 일어나겠지만 억조창생 인간들이 다 예수님께 업혀 누르고 있으니 압사(壓死)할 정도입니다. 아담이 죄 지은 이후로 예수님까지 약 4,000년간 참으시고 축적되었던 진노, 인간의 죄를 다 몽땅 뒤집어씌우면서 내리누를 때 예수님의 아픔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성도 여러분! 정말 우리는 예수님의 아픔을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시 7:11-12). 날마다 분노하시며, 칼을 예리하게 갈아 놓았다면 한 번은 그 칼로 심판하지 않겠습니까? 활을 잡아당긴다면 언젠가는 놓을 것입니다. 이미 당기신 화살이 예수님께 박혔으니 예수님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나를 쏘는 순간 대신해서 맞아 죽는, 구속해 주신 예수를 생각할 때 여러분들의 남은 생애는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헌신 봉사, 일사각오 순교 정신을 가지고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함을 드리는 것입니다.


계절적인 아픔

고난주간을 지키고 있는 지금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이때가 오면 온통 들에나 산에나 만물이 봄소식을 알려주는 봄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3살 젊은 나이, 이 봄철에 싱싱하게 피어야 될 그분이 시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분이 새 봄에 왜 죽을병에 걸렸습니까? 왜 시들어야만 했습니까? “내가 여기 있노라!” 하고 만물이 다 소생하는 판인데 33살 젊은 나이로 시들어야만 했고, 죽어야만 했던 예수님의 심정, 마음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예루살렘 거리를 벗어나 갈보리 언덕까지 가시는 길에 모든 새싹들이 돋아나는 춘삼월(春三月), 푸르른 들판을 바라보면서 ‘만물은 소생하는데 나는 죽어야 하는구나! 나는 죽어야 돼. 아버지 말씀에 순종해야 돼. 내 생각 필요 없어. 내 마음이 있으면 뭐해? 내 마음대로 못하는 거....’ 골고다를 올라가실 때 몇 번이고 넘어져 기진맥진했던 그 순종의 아픔을 나나 여러분들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히 5:7, 사 53:2, 7). 그 길에서 주님 말씀이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했습니다(눅 23:31). “생명 자체인 나도 이렇게 되는 판인데 생명이 없는 너희는 어떻게 되겠느냐?” 그 아픔! 제자들한테 평안할 때 교훈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30관짜리 무거운 것에 내리 눌리면서, 쓰러지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대속적(代贖的)인 아픔

죄가 있어 맞는 매는 견디기 쉽고, 참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 없이 맞는 매는 더욱 아프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온 인류를 대신해서 형벌 받으시는 줄을 아시는 까닭에 그 쓰라린 아픔을 다 참았습니다. 나 하나가 죽어 버리면 모든 인생이 지옥의 형벌을 면하고 영원히 산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됐는데도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벧전 2:19-21). 여러분들은 주님을 위해서 얼만큼 참았습니까?


강한 자로서 약자에게 당하는 아픔

예수님의 고난은 의인으로서 악한 자에게 당하신 고난이었고, 강자로서 약자에게 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어떠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까? 여기에는 최대의 순종의 표본(標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인내! 최대의 순종과 인내의 본이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우리는 깨달아야만 되겠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한테 맞아 죽는 것에는 힘이 있으면서도 약한 자에게 맞으면서 끝까지 견디려고 하는 감정의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고(마 26:53), 하나님에 대한 순복(順服)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세상, 내 힘만 못한 사람들을 억누르고, 나보다 강한 자에게는 아부하는 세대에 강자로서 약자에게 굴욕을 당하면서 끝까지 참으시는 그 마음의 아픔! 그리스도는 창조주로서 피조물에게 고난을 당하시면서 입을 열지 않고 아픔을 삼켰습니다. 이중(二重)의 아픔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때려?” 소리하면 어떻습니까. 그 말 한 마디 못하고 삼킵니다. 이 고난의 위력이 우리들을 죄악에서 구속(救贖), 곧 죄 사함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고린도후서 13:4에는 약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상하신 얼굴과 온 몸에 맞으신 상처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양손, 양발, 또한 못 자국, 생살이 뚫려서 힘줄이 늘어나고 살점이 못에 묻어 나무토막에 박히는 것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인정사정없이 옆구리를 콱 찔러서 예수님의 심장을 뚫는 그 광경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다고 했습니다(사 52:14).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서는 예수님의 상하신 몸을 보고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까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예수님의 마음의 아픔은 얼마였겠습니까.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롬 6:23). 죄를 지은 자는 저주를 받아야만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그 대가를 지불하는 순간(고전 15:3), 유황불 타는 곳에 나를 대신해 들어가 ‘부직부직’ 타는 순간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습니다(고후 5:21). 그러니 얼마나 놀라셨겠습니까.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아리마대 요셉이 되어야 하겠습니다(막 15:43, 46). 예수가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 판국에 아리마대 요셉은 세마포를 준비해 놓고 당돌하게 빌라도 총독한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 고난주간에 모두가 신령한 아리마대 요셉 같은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지키고, 교회를 감싸주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오해받고 죽어갈 때에 여러분들이 신령한 아리마대 요셉이 되어서 교회를 싸매주는 세마포가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에 발라 시신이 썩지 않고 향기를 진동시킬 수 있을 정도로 방부제 역할을 하게 했습니다(요 19:39). 몰약과 침향 백 근이면 지금 돈으로 수억대입니다. 고난주간 때 여러분들도 신령한 니고데모가 되어서 우리 주님 부활 직전에 시신을 끌어안고 “나 때문에 이 모양이 되셨습니까!” 하면서 주님을 장사지낼 수 있는 준비를 하시는 신령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산 생애보다 남은 생애, 정말 내가 예수님의 아픔에 대해서 모른데 대해서 회개하면서 “어떠한 괴로움이 있어도 나, 입을 열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말이 없다고 했습니다. 입을 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벧전 3:10). 마찬가지로 예수의 영을 받은 여러분들은 고난주간 때 정말 한 가지라도 담당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92년 4월 14일 고난주간 특별성회 박윤식 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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