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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목사님의 성경 지식과 이해는 세상 누구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 정원식 전 국무총리 (1)
 글쓴이 : 관리자
 

뜻깊은 인터뷰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박윤식 목사님과의 관계를 말씀해 주십시오.

박윤식 원로목사님과 저와의 관계에 대해서 흔히 삼동(三同)이라고 얘기를 하죠. 첫째 동(同)은 고향(사리원)이 같다는 것, 둘째 동(同)은 나이가 같다는 것, 셋째 동(同)이 같은 학교(해주동중)를 다녔다는 것입니다. 졸업 후에는 각각 월남을 해서 저는 주로 서울에서 생활을 했죠. 노량진 대성교회 때 제가 교회를 등록하게 되면서 다시 만나게 됐죠.


해주동중 동창이시군요.

네. 나는 일제 시대부터 다녔고, 박 목사님은 해방 후 일본 사람들 물러간 다음에 한국 학생들을 더 받아들이면서 들어와서 나와 같이 졸업했습니다. 별로 접촉은 많지 않았다가 서울에 와서 알게 됐고 이야기 하다 보니 학교 얘기도 많이 하게 됐고 학교 생각도 많이 나고 그랬지요.


해주동중에 몇 년도에 입학하셨습니까?

1942년입니다.


그때 중학교가 몇 년제였습니까?

원래 5년제였습니다. 그런데 일제 말에 모든 중학을 1년씩 단축시켜서 4년제가 됐죠. 그래서 나도 서울에 와서 바로 대학에 가지 못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밖에 없게 됐죠. 그때 막 고등학교가 생겼을 때에요. 그런데 마침 서울대에서 처음으로 예과생을 모집하는 바람에 예과를 2년 다닌 뒤 서울대 교육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황해도에서 해주동중이 제일 좋은 학교였다죠?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었죠. 황해도 각 시군에서 많아야 2명 내지는 3명 정도가 올 수 있었어요. 그때 우리 동기들이 세 반인데 한 반이 꼭 50명이었어요. 그래서 150명인데 무슨 이유인지 2명이 더 많아서 총 152명이 졸업했습니다. 그중에 50명은 해주 출신이에요. 해주에 욱정초등학교와 행정초등학교가 있었는데, 두 학교에서 50명이 왔어요. 그 당시 해주동중에 가려면 해주 가서 소학교 5, 6학년을 다니고 준비해야 된다고 그랬어요. 나는 사리원에서 소학교를 졸업했는데, 우리 학교(부도 공립보통학교)에서는 두 사람이 해주동중에 갔죠.



두 분의 고향인 사리원은 작은 도시였나요?

아뇨. 황해도의 도청 소재지가 해주였고, 두 번째로 큰 도시가 사리원이에요. 그때는 도시가 일정한 규모가 되면 ‘읍’이라고 그랬는데, 사리원은 읍이었죠. 그러다 해방 후에 ‘시’가 됐죠. 사리원만 해도 큰 교회가 몇 군데 있었어요. 내가 다니던 사리원 서부교회도 큰 교회였죠. 박윤식 목사님께서는 아마 다른 교회(주: 사리원교회) 다니셨던 것 같아요.


사리원이 인구가 몇 명이나 되는데 그렇게 큰 교회가 여러 개였습니까.

내 기억으로는 그때 인구가 2만 5천~3만 명 될거예요. 재령이나 사리원 등 황해도 일대나 평양 근방에 보면 기독교인 수가 비례적으로 상당히 많았어요. 38선 남쪽하고는 달랐죠. 가령 남쪽은 100명 중의 10명이 기독교인이라면 이쪽은 100명 중에 60-70명이 기독교인이었죠. 가정적으로 벌써 기독교 가정이 많다는 거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북쪽이 남쪽보다도 빨리 기독교를 받아들인것과도 연관돼 있죠. 기독교가 와서 제일 발을 붙이기 어려웠던 데가 충청도예요. 충청도는 전통적으로 유교 사상에 꽉 사로잡혀 있었어요. 기독교가 제사를 못 지내게 하는데 유교사상에서는 제사를 안 지내면 자식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갈등이 아주 심했죠. 그에 비하면 황해도나 평안도는 그런 점에서 조금 자유스럽고 개방적이었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비교적 잘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어요.


해주동중 152명 동창 중에 일본 학생도 있었습니까?

우리 동창 중에는 없었어요. 그전에는 일본 학생도 같이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입학하기 바로 전해에 해주서중이 생겼어요. 해주서중에는 한국 학생이 10% 정도였고 90%는 일본 사람이었죠.


152명 동창 중에 일부는 해방 후에 합류한 것이고요?

네. 해방 후에 한 학급을 더 늘리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해주동중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많았는데 일제 시대에는 학급 증설을 못하다가 해방되니까 좀 더 받아야 되겠다 해서 한 학급을 증설하면서 두 반이 세 반이 된 거죠. 해방 후인 1946년에 졸업을 한 뒤 나중에 서울에 와 보니까 그중 125명 정도가 서울에 왔더라고요. 거의 대부분이 월남을 한 거죠. 윤자중(전 공군참모총장, 교통부 장관), 조완규(전 서울대 총장), 장석진(전 서울대 교수) 등도 그중의 일원이에요.


왜 그렇게 많이들 월남했습니까?

우선 해주가 38선 접경 지대였고, 서울에 대한 동경심이 좀 있었고, 그리고 해주동중을 마치면 대개 상급 학교에 갔거든요. 일제 시대에는 일본에 있는 고등학교 아니면 서울대 전신인 경성대학 예과나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동국대의 전신인 동국전문, 이렇게 세 전문학교로 갔습니다. 가장 우수한 학생들은 역시 서울대로 가고 차석 정도 되는 학생들이 전문학교에 많이 갔죠. 저도 고향에 가서 부모님에게 서울 가서 공부하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 일주일 동안 집에 있다가 단신으로 월남했죠. 그런데 6.25 전쟁이 일어나는 통에 가족들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어요. 그러나 1.4 후퇴 때 부모님이 동생들과 같이 월남을 하셔서 서울에서 극적으로 다시 만났죠.


박윤식 목사님은 다른 중학교에 다니다가 해주동중으로 편입하신 건가요?

그건 분명치 않아요. 다른 중학교를 일제 시대에 다니다가 해방 후에 들어온 걸로 알고 있어요.


해주동중은 기독교 학교였습니까?

아니에요. 황해도에는 사리원에서 멀지 않은 재령에 기독교 계통인 명신소학교가 있었어요. 기독교 집안 자녀들은 주로 명신소학교를 나온 뒤 명신중학이나 명신여중에 진학했다가 그 다음에는 역시 기독교계통인 숭실전문에갔지요. 숭실전문은 서울에도 있고 평양에도 있는 3년제 전문학교였어요. 그것도 한국 학생들에게는 최고 학부였죠. 그렇지만 해주동중은 전통적으로 대학 진학을 위한 코스였고, 해주동중을 나오면 대부분 서울에 와서 대학을 갔죠. 우리 동기들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로 많이들 진학했어요.


황해도에서 해주동중 다닌다 하면 다들 부러워했겠군요?

글쎄. (웃음) 내가 다녔기 때문에 말씀 드리기 좀 이상하지만 역시 다 부러워했죠. 해주동중 학생들이 백색 흰줄을 두른 까만 모자를 쓰고 다녔어요. 그때 제복이 있었거든요. 그 모자만 쓰고 거리에 나가도 사람들이 쳐다보고 부러워할 정도였어요. 그만큼 자부심이 있었어요. 다들 머리들이 좋고. 그러다 해방이 딱 되어가지고 일본 교사들이 다 일본으로 떠나고 남은 한국인 교사가 세 사람밖에 없었어요. 체육 선생, 영문과 선생, 미술 선생이었죠. 그런데 해주동중을 마치고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학병으로 나간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우리 앞 세대는 학병세대라고 하는데, 해방되기 3년 전부터 일제가 학병을 거의 강제로 모집했거든요. 그래서 한국 학생들이 학병으로 나가서 육군 장교로 만주와 중국에 많이 갔어요. 해방이 되니까 그 사람들이 일본군 중위 계급장을 달고 중국에서 많이 돌아왔어요. 돌아와서 보니까 학교에 선생이 없잖아요? 그리고 해주동중 선배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들어와서 임시 교사가 됐어요. 우리는 주로 해방 후에 그들에게 배웠어요.


해주동중 출신으로 월남한 뒤 박윤식 목사님처럼 군에 입문한 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겠군요.

단신으로 월남한 사람들은 우선 기숙할 데가 없는데 유일하게 군대만은 숙식을 제공해주니까 군대에 간 친구들이 더러 있어요. 처음에는 그냥 잠시 기숙하다가 지내다 보니 군 생활도 괜찮아서 장교가 되고 진급한 사람들이 몇 있어요.


해방 후 소련군이 북한 지역으로 진주한 뒤 공산주의 교육을 많이 시켰다면서요?

그랬죠.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적인 얘기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 끌었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무산자(無産者)를 위한 정치를 한다.’고 선전했거든요. 1946년에 김일성도 해주동중에 와서 연설을 했어요. 평양의 무슨 위원장 자격으로 왔었죠. 그때 이북에서는 실질적으로 벌써 정부 조직을 시작했어요. 남쪽보다 빨리 시작했죠. 해방 직후에는 공산당이 주민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책도 많이 폈어요.


* 당시 상황에 대해 해주동중을 나온 뒤 경성제대 재학 중 학병에 끌려갔다 해방 직후 돌아와 교사로 재직했던 조성식 교수(전 서울대 교수, 고려대 교수)는 이렇게 술회했다.


“당시 가르친 해주동중 4학년 학생(편집자 주: 박윤식 목사와 정원식 장로의 동기생들) 1백 60여 명 중1백 12명이 월남했습니다. 학생들이 공산당에 반대하는 시위를 자주 벌여 해주동중이 ‘백색 반동의 본거지’로 불렸어요. 1946년 7월 공산당에서 ‘4학년 학생들이 졸업장 받고 모두 월남한다는 정보가 있으니 졸업장을 써주지 말라’는 지령이 내려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 졸업증명서를 써 나누어 주고 바로 남으로 도망쳤습니다.”(1990년 5월 15일자 동아일보)



대성교회에는 누구의 인도로 오셨습니까?

우리 집사람이 먼저 교회에 오게 되었는데, 그 다음에 날 끌어들였죠.


처음 오셨을 때 인상이 어땠나요?

아주 좋은 인상을 받았죠. 박윤식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영향도 크고. 그게 아마 1980년도일것 같아.

임학영 권사 : 그때 우리가 화곡동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여선교회 회장이었죠. 그런데 교회에서 김은정 전도사님이 먼저 대성교회로 옮겼고 그 다음에 김혜자 권사가 옮기더니 그 두 사람이 나에게 간곡하게 권하더라고요. 말씀이 너무 좋다는 거였죠. 그래서 성경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말씀이 너무 좋더라고요. 한마디로 말씀에 미쳤다고 할 정도였어요. 너무 좋아서 날아갈 듯했죠. 장안산 구국기도회 때 처음 갔고 그 뒤에 교회를 옮겼어요. 제가 교회를 옮기면서 30여 명이 같이 교회를 옮겼죠. 그런 뒤로도 이 양반(정원식 장로)은 1,2년 뒤에야 우리 교회로 왔어요. 내가 ‘한 집안에서 다른 교회를 나가면 되겠느냐’고 보챘죠. 그때만 해도 두 분이 동창이라는 건 전혀 모를 때였어요. 우리 교회가 이단이라는 누명을 쓰고 어려움을 겪을 때였으니 오기가 더 쉽지 않았죠. 그런데 결국 따라서 오게 됐고, 교회에 와서는 목사님과 동창인 걸 알고 금세 친해졌죠. 그 다음부터는 이분이 교회에 대해 무척 헌신했어요. 교회의 어려운 일마다 다 나가서 도와드리고. 목사님께는 일등 공신이자 일등 친구였죠. 한번은 목사님이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원식이가 키가 커서 (학창 시절) 농구는 잘 했다.” 그래서 이 양반한테 물어봤더니 키가 커서 농구를 했었대요. 이분은 목사님과 학창 시절 교제가 없었다고 하지만 목사님은 그런 걸 보신 거예요.




두 분이 서로 뭐라고 부르셨나요.

서로 이름도 부르지 못하고 “목사님” 하고, “정장로” 그렇게 불렀죠.


임학영 권사 : 박윤식 목사님은 영적으로 제일 높으신 수준에 있는 분이잖아요. 그리고 이 사람은 사회적으로는 국무총리니까 제일 높잖아요. 그러니까 동창이라고 애, 쟤 하는 법은 없었어요. 서로 존대하고 “정 장로”, “네, 목사님” 그러지.


두 분이 서로 어떻게 생각하시는 것 같던가요?

임학영 권사 : 이분도 그전까지야 성경을 교회에 가지고만 다녔지 언제 제대로 봤나요? 그런데 우리 교회 와서 성경을 깨닫게 되고, 그러니까 목사님을 참 특별하신 분으로 생각하고 존경했죠. 목사님도 이 사람은 앞으로 이 사회에 많이 공헌할 분이구나 생각하셨으니까 존경을 했고. 두 분이 굉장히 존경하셨어요.


우리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장로님을 표적으로 삼거나 왜 평강제일교회에 다니느냐고 공격하지는 않았습니까?

나한테는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 스스로도 ‘내가 왜 평강제일교회에 왔을까’ 생각한 일이 없고 당연히 와야할 데를 온 걸로 생각했어요. 목사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그런 신념을 더 갖게 됐고요.


평강제일교회 온 것을 후회하거나 ‘남이 물어보면 어떻게 답변할까’ 그런 생각을 한 일은 전혀 없었어요. 평강제일교회를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목사님들이 있다면 내가 왜 그 교회에 갔을까 의문시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질문을 받아본 일이 없어요.


임학영 권사 : 이 양반은 모르시는 척 하는 거지요. 어디 가서 사람들이 저를 ‘이분이 정원식 총리의 사모님’이라고 소개하면 ‘응, 이단에 간 정원식?’ 이라고 수군거려요. 그렇지만 이 양반은 “뭐가 이단이야? 내가 갔는데 뭐가 이단이냐?”고 하곤 했죠. 제가 여선교회 회장할 때 세미나 프로그램을 이분이 짜 주시고 민경배 박사(당시 연세대 신학과 교수)에게 주제강의를 부탁드렸어요. 그랬더니 민 박사님이 “왜 날 보고 그 교회에 가라고 하느냐?”고 했대요. 그래서 이분이 “내가 있는데 왜 이단이냐?”고 하면서 끌어오셨죠. 와서 주제 강연을 하시더니 “아, 이 교회가 좀 다르구나.” 하면서 감탄하고 오해를 푸셨어요.


*정원식 장로가 국무총리로 재직 중이던 1991년 10월 19일 자 동아일보는 이런 기사를 실었다. “개신교단에서 큰 교단으로 꼽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총회장 최삼경)이 지난달 열린 정기총회에서 예장합동보수측(총회장 김복천)의 서울노량진 대성교회와 이 교회 박윤식 원로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한 데 대해 합동보수측이 통합측 관계자들을 형사고발키로 결정, 대성교회를 둘러싼 이단 논쟁이 더욱 가열되는 느낌. 이번 이단 논쟁은 대성교회가 신자수 4만여 명의 대형교회인데다 정원식 국무총리가 장로직을 맡고 있어 더욱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후략)” 정원식 장로는 최초의 서울시장 민선 선거였던 1995년 지방선거에 집권당인 민자당 후보로 출마했을 때도 상대측으로부터 “대성교회가 이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공격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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