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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원로목사님 사모 민갑식 여사 인터뷰(1)
 글쓴이 : 관리자
 


“그분의 평생 사랑은 오직 성경책, 그리고 성도들” - 박윤식 원로목사님 사모 민갑식 여사

휘선 박윤식 원로목사님의 성역(聖役) 60주년, 구속사 시리즈 발간 10주년을 맞는 2017년을 맞아 ‘참평안’은 휘선기념사업회, PCN(평강제일교회 방송국)과 공동으로 특별 인터뷰 시리즈를 기획하고 첫 번째 인터뷰 대상자로 박윤식 원로목사님의 사모(師母) 민갑식 여사를 선정했다.


동서고금의 많은 권력자들이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측근 때문에 험악한 말로를 걸었다. 굳이 역대 대통령까지 언급할 것도 없다. 한국 기독교계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특히 목회자의 부인이 숨은 권력이 되어 분란이 나는 교회가 적지 않다. 그래서 박윤식 원로목사님은 항상 “우리 교회 목사님들은 우리 집사람 얼굴도 모른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배우자와 세 아들이 교회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게 한 덕분에 평강제일교회는 설립자 가족에서 비롯되는 조그만 잡음도 없는 건강한 신앙 공동체가 됐다. 그 뿐 아니다. 박윤식 원로목사님은 말씀과 기도의 일평생을 살며 교회를 집으로 삼고, 성도를 가족으로 삼았다. 성도들은 아버지 같은 목자를 만나 무럭무럭 성장했지만, 그 과정에서 원로목사님의 친 가족들은 희생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들의 인고의 세월이 없었다면 박윤식 원로목사님의 위대한 목회는 있을 수 없었고, 오늘의 평강제일교회와 평강 성도들도 존재할 수 없다.


인터뷰는 지난 2016년 12월 25일 성탄주일 예배 후 교회에서 이뤄졌다. 우리 나이로 새해 83세가 되신 민갑식 여사는 건강하고 쾌활하고 유머러스했다. 분위기와 어감을 살리기 위해 민갑식 여사의 말씀을 최대한 그대로 전한다.



오늘은 말씀이 육신 되셔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뜻 깊은 성탄절에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박윤식 원로목사님의 사모님을 인터뷰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선 언제 어디서 태어나셨는지부터 여쭤보겠습니다.

충청남도 당진군 합덕면 신성리에서 태어났어. 음력으로 1934년 10월 4일인데 호적상으로 1935년 4월 2일로 돼있어. 10남매 중에 아홉째지. 위로는 오빠가 다섯, 언니가 셋. 밑에 동생 하나 있고, 여동생.


굉장히 자녀가 많은 집안이었네요. 왜 이렇게 많이 나셨답니까?

우리 엄마 보고 물어봐. (웃음).


아버님은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 집이 여흥 민씨야. 동네에서 대가(大家)집이었지. 할아버지들 4형제가 다 벼슬 하시고, 동네에 한 줄로 큰 집을 짓고 잘 사셨어. 우리 아버지는 찬물 잡숫고도 이를 쑤실 정도로 양반 풍습이 몸에 밴 분이었지. 나도 참 조신하게 자랐지. 조금만 잘못하면 혼났거든. 아버지는 농학을 공부하고 농촌 지도자셨어. 해방 전까지는 부자였지. 그런데 오빠들이 모두 일본병대(兵隊: 군대)에 징집되고, 해방 전 해에 넷째 오빠까지 영장을 받은 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어. 신경을 많이 쓰셔서 쓰러지신 거지. 해방되면 어떻게 뭐 좀 해보려고 하셨는데 결국 아무 것도 못 하시고 13년간 병석에계시다가 돌아가셨어.


그 때 사모님이 10살 쯤이었겠군요.

9살 땐가, 10살 땐가 그런 것 같아.


아버님에 대해 어떤 기억이 남아있나요?

왜정 시대에는 왜놈들에게 시달리는 거나 봤고, 그 후로는 병석에 계신 것만 봤지.


부모님께서 교회에 다니셨나요?

우리 어머니가 천주교를 나가셨어. 아버님은 안 다니셨고. 시골에는 성당이 다 멀리 있잖아. 온 가족이 다같이 열심히 믿는 가족은 아니었고 어머니도 여러 남매 거느리고 사시느라 바쁘면 못 가시고, 나도 어쩌다 따라다니고 그랬지.


언제까지 거기서 자라셨나요?

오빠들도 없고 아버지도 그렇게 되니까 바깥 일도 모르고 사시던 어머니가 뭐 할 줄을 알아야지. 그러니 논 팔게 되고 마지막에는 집까지 팔게 됐어. 그렇게 힘들어지니까 오빠들이 해방돼서 돌아온 뒤 예산으로 이사를 갔어. 내가 12살 때 해방이 되고, 13살 때 예산으로 이사 간 것 같아. 그래서 예산에서 쭉 살다가 19살 때인가, 20살 때인가 서울 양남동으로 이사했지.


서울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오빠 집에서 살았어. 큰 언니는 고척동에 살았고. 일은 안 하고. 교회생활은 했지.


그 때부터 교회에 다니셨군요. 어느 교회에 다니셨어요?

영등포에 새마을교회라고 있었어. 그 교회가 지금은 없는 것 같더라고.


영등포 어디쯤이었나요?

영등포 시장 가다 중간쯤 새마을교회라고 있었는데, 양남동에서 걸어오다가 시장 못 가서 왼쪽에 있었어.


누가 교회 가자고 전도를 했나요?

누가 전도했길래 갔겄지? (웃음)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내가 자랄 때 엄청 엄하게 자랐거든. 그런데 부모님한테서 떨어져 나와 살게 되니까 물론 오빠도 엄하지만, 그래도 자유로운 거야. 그래서 스스로 구속(拘束)받기 위해서 교회를 선택한거야, 그때.


두 가지 의미에서 구속이군요. 구속사의 구속(救贖)이기도 하고 스스로 속박되는 구속(拘束)이고.

응. 스스로 신앙생활을 택한 거야.



그래서 원로목사님은 언제 어디서 만나셨습니까?

그 시절에 중매로 만났어.


사모님 몇 살 때인가요?

나 스물두 살 때


서울 올라오셔서 금방이군요.

그렇지. 서울 올라와서 한 3년 교회 다녔는데 같은 새마을교회 다니시던 권사님이 “아주 신앙 좋은 청년이 있다고, 한번 만나보라고” 하면서 중매하더라고.


어디서 만나셨나요?

기억이 안 나는데 그 때는 뭐 기껏 해봐야 다방이지.


원로목사님 첫 인상이 어떻던가요?

그냥 말쑥하고 똑똑해 보이더라고.


무슨 이야기 나누셨어요?

그거, 기억 안 나지. 그런 것까지 어떻게 기억하나. 60년이 지났는데.(웃음) 똑똑하게 생겼으니까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을 것 같고, 가진 건 없지만 사람 하나 똑똑한 거 보고 만났지. 집에서는 많이 반대도 했지만, 결혼했어.


그 때가 1956년쯤 되겠군요.

그렇지. 그리고 57년도에 결혼하고. 58년도에 요한이(첫 아들)를 낳고. 그래서 내가 서울 와서 아무 것도 없는 사람과 결혼한 거야. 진짜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었어.


집에서는 왜 반대하셨어요?

이북 사람이라고. 이북에서 뭐 하고 어떻게 산 사람인지 모르고 어떻게 하느냐고. 그런데 나는 아무도 없고 혼자라는 게 마음에 들었어. 옛날에는 양반 집으로 시집가려면 옷이고 뭐고 다 해가지고 가야 하는데, 우리 집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으니 나는 ‘내가 저렇게는 시집 못 간다.’ 해서 서울로 올라온 거였거든.


그때 원로목사님이 군에서 제대하신 뒤인가요?

그렇지. 그런데 그 때도 그냥 신앙생활 하느라고 산이고 어디고 돌아다니더라고. 말이 그렇지 연애도 못해봤어. 하도 이 양반, 그냥 기도하러만 다니고 그래서... 기도 많이 하시는 분이니까 내가 믿었지. 혼자라도.


결혼식은 어디서 하셨어요?

시골에서.


예산 처가로 가서 혼례를 하셨군요. 전통혼례로요?

아니, 신식으로. 그 동네 교회 목사님이 안 계셔서 장로님이 주례하시고 집에서 했어. 신랑이 교회에 다니니까 성당 가서는 할 수 없고, 집에서 예배드리는 식으로 아주 간소하게 했어. 반지 하나 할 형편이 안 됐지.


신혼여행은요?

신혼여행이 어디 있어? 음력 1월에 결혼했는데, 쌀 퍼내가야 겨우 돈 만지는 친정집에 대고 나 신혼여행 보내달라는 소리는 안 나오더라고. 결혼하고 며칠 있다가 서울로 왔지. 그게 신혼여행이지 뭐, 시골서 서울 왔으니까.


그 뒤 신혼생활은 어땠습니까?

신접 살림도 안 차리고 그냥 기도를 그렇게 하러 다니시고. 주로 산에 가서 많이 사시더라고. 나중에 다녀와서 ‘어느 산에 갔다 왔다’ 그러면 그런 줄만 알지. 우리 요한이 낳을 때는 아예 소식이 끊겨서 어느 산에 가서 있는지도 몰랐어.


편지도 안 오고요?

아이구, 편지가 어딨어.


왔다가는 또 나가시고.

또 가.(웃음)


그러면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남편으로 믿고 살기가 어려운 지경이지 않습니까?

진짜 힘들었지. 우리 요한이도 힘들고 나도 힘들고. 어떡하겄어? 우리 친정어머니 모셔다 놓고 애기 맡기고 내가 회사 생활을 적극적으로 했지. 내가 직업 찾아 나선 게 어딘가 하면 동양모직이라고 있어. 거기에 취직을 해서 다니면서 내가 벌어 생활하고 애 기르고 그랬지. 그렇지만 나는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그 사람 신앙생활 열심히 하니까 좋았고, 아무 것도 없고 혼자여서 좋았고. 왜? 부모들이 해주는 대로만 바라보고 있었으면 어떤 집에 가서 식모살이 하고 살았을지 모르는데, 식모살이는 안 하고 살았잖아.



원로목사님은 댁에 계실 때는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그저 책 보고 책상 앞에 앉었지, 가족 하고 어디 한번 가고 그런 거 없어. 너무너무 책에 매달려 살고 기도생활하고. 그저 자고 눈 떠 보면 책상 앞에 가서 성경 보고 앉아 계시고... 그게 일이야. 목사 되려고 그랬나봐.


부인이지만 ‘이분은 좀 특별한 분이구나.’라고 생각하셨겠네요.

그랬지.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다고 그렇게까지 매달리겠어. 그러니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사람보고 뭐라고 그러겄어?


그때 사모님도 신앙이 독실하셨나봐요.

나도 그때 잘 믿었나봐. 원래 첫 신앙이 제일 뜨겁잖아. 잘 믿었길래 그런 걸 이해하고 살았것지? (웃음)


불평하시거나 싸우시진 않으셨어요?

그런 거 없어. 그리고 그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어. 바로 동마산교회 맡아서 갔으니까.


그게 첫째 아드님 낳으신 다음이군요.

그렇지. 한 살 때. 동마산교회 가서 목회 하시면서 거기서 혼인 신고도 하고, 애들 호적 올리고 거기서 살았지. 한 3년. 우리 둘째(승천) 날때까지 거기서 살았으니까.


원로목사님이 남자로서는 어떤 매력이 있었습니까?

매력? 아휴 참, 무슨 매력이 어딨어? 그렇게 성경에만 매달려 사는 사람이 무슨 매력 있어?


일단 잘 생기셨고.

괜찮았어. 이쁘장하고.(웃음).


대화할 때는 상냥하셨나요?

말은 잘 하시지...(웃음).


‘내가 먹고살 걱정 없게 하겠다.’ 하는 말씀은 안 하셨어요?

지금은 고생시키지만 나중에 잘 살게 하겠다고 그랬지. 그러나 그 양반이 어디 가서 노동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디 가서 품 팔아 돈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원로목사님은 사모님의 어떤 점을 보시고 결혼하셨을까요?

모르지.


얘기하신 적 없으세요? 내가 당신 이런 것 때문에 결혼했다고.

내가 중매자한테 들은 말인데, 어디서 천사가 오나 했다고 그래. 그러니까 잘 봤나 보지. 얌전하게 봤다 그 말이지.


그때 사모님이 얌전하고 천사 같은 성격이셨어요?

그때는 진짜 그랬겠지. (웃음). 집에서 양반 수업 받으며 컸는데, 우리 아버지가 양반집으로 시집보낼 거라고 얼마나 시집살이를 시켜가며 가르쳤겄어. 나는 아버지한테 시집살이 하고 컸기 때문에 목사님하고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해.

원로목사님이 언제부터 그렇게 성경만 공부하시고, 기도만 하셨다고 말씀 안 하시던가요?

내가 들은 건 군대에 계실 때도 그렇게 신앙생활 했다는 소리밖에 못 들었어. 그러니까 타고난 거야. 누가 시킨다고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 같아.


그런 분이 또 어디 있겠어요?

그려. 그래.


원로목사님이 어린 시절이나 월남하시기 전에 대해 말씀하신 적은 없었나요?

응, 전혀 얘기가 없었어. 몰라.


동마산교회 목회하실 때도 생활이 넉넉지 않았죠?

그 때 돈으로 3천원 받았나? 쌀 한 말인데 그것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어. 진짜 어렵게 살았지. 그냥 굶을 때가 많았어. 그렇지만 원로목사님은 가난 이런데 치우치지 않아. 그런 건 생각도 안 해. 그저 교회에 있으면서도 어딜 하루 종일 가있다 오면 어디 갔다 왔냐 하면 산에 가서 기도하고 왔다고 그러고. 주기철 목사님이 기도한데서 기도했다고 그러시더라구.


성도들을 대하시는 모습은 어땠어요?

좋았죠.


부모 같은 마음으로 성도들을 대하셨나요?

그럼. 또 거기가 시골이고 다 어려운 사람들만 살더라고. 재밌게 잘 지냈어요, 형편은 어렵지 만 재미는 있었어, 서로가.


정이 있고.

응. 그렇지만 목사님 꿈은 그게 아니잖아. 언제까지 그 작은 데서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다가 장안산과 지리산으로 들어가셔서 기도하신 거군요.

하여튼 처음부터 나는 그 양반이 항상 산에 가서 사는 걸로 알았어. 그러다가는 아주 오랫동안 아주 산에 가서 묻혀 있더라구. 그때 지리산, 장안산 가서 기도하신 거야.



지리산과 장안산 기도처에 나중에 가보셨나요?

장안산 세 번 갔고, 지리산 한 번 갔고.


사모님께서 보신 느낌은 다를 것 같아요.

이런 데서 기도했구나 그랬지. 고생 많이 하셨겄다, 그랬지. 상상해봐. 혼자서 그 무서운 데서, 나 같으면 하루 저녁에 기절해서 죽고 말았을 거야(웃음). 그 깊은 산중에서...


저희는 장안산, 지리산에서 오래 산상기도 하신 것만 알지만 사모님 보시기에는 처음부터 늘 산에서 사신 분이군요.

그럼. 목회할 때도 어떤 때는 새벽부터 없어지셔. 그런 날은 노방전도하는 거야. 거기 장로님이 하나 계시는데 그분하고 나가셔서 북치고 노방전도 했다고 그래. 북을 떵떵 치면서, 그 시절에는 그래 가며 전도들 했어.


동동구리무 장사처럼 노방전도하셨다는 그 때군요? 우리 성도 중에도 그 때 원로목사님을 보신 분이 있더라고요.

동동구리무야 있었겠어? 그냥 그런 식으로 북 치고 전도했겄지.


서울 올라오셔서도 맡은 교회 없이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셨죠?

그러고 나서 서울로 올라왔지, 무작정. 전도해서 하나 둘 모아가며 가정에서 예배드리며 그렇게 시작한 거야. 그 때 처음 만난 사람들이 전극화, 엄선아, 김정화, 이인애 권사 이런 사람들이야.


그분들은 어떻게 알고서 오시게 된 거에요?

삼각산 기도원 같은 데로 기도하러 갔다가 하나하나 만나고, 말씀이 좋으니까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들 듣고, 이렇게 시작된 것 같아. 우리는 처음에는 소사에서 방 하나 얻어서 살았고, 그 다음에는 집값이 제일 싼 양남동에 조그만 집 하나 사 가지고 전도사님들이랑 같이 지냈지. 그나마 식구가 많고 벌이는 없으니 결국 그 집도 팔게 됐고 수원으로 옮겼지. 거기서 셋째가 태어났지. 그게 1965년이야. 도승이 태어날 때도 교회가 아직 없었어. 전극화 장로네 집에서 주로 성경공부하고 그랬던 것 같아. 그저 집에 와서 아침 한술 먹으면 전도 나가고 심방 나가고. 우리 여운초 목사님이 일 많이 하셨지. 지금까지도 남아계시잖아. 수원에도 이영숙 전도사하고 새로 전도되는 사람들이 몇 명와서 성경공부를 했어. 목사님은 또 서울 올라가서 전도하고 성경공부 시키러 다니시고.


그때 두 명씩 짝지어서 전국으로 전도 보내시고...

그렇지. 내가 양남동에서 살 때만 해도 그렇게 전도들 많이 나갔지, 지방 전도를.


생활은 어떻게 하셨어요?

그냥 어렵게 살았지 뭐. 친정에 가 구걸도 해다 살고(웃음). 당신이 조금씩 갖다 주면 그걸로도 살고. 그 때는 애가 둘이나 되니 내가 벌지도 못했어.


1969년에 시온산한돌교회가 세워졌으니까 그 기간이 꽤 길었군요.

길었지. 한참 길었지.


교회 세워졌을 때 성도가 몇 분 쯤 됐나요?

한 100명 됐을까? 일석교회 세운 뒤에는 전도사님들이 여러 명 활동하니까 내가 그 전도사님들을 집에 다 모시고 살았었어.


집이 크지 않았을 텐데.

작아도 다 한 방에 모여서 그러고 살아가면서 일들 했어. 그 중에 끝까지 남은 사람이 여운초 목사님이지. 교회를 세운 뒤부터 얘기는 사실 내가 해줄 게 없어. 지금 계신 성도들이 더 잘 알 거야. 교회를 집으로 삼으셨고, 성도들을 가족으로 삼았으니까. 집에서는 잠만 주무시고 아침 한 술 드시면 전도 나가고, 심방 나가고, 교회에 사시다시피 했어. 내가 굳이 말 안 해도 내가 아는 것과 성도들이 아는 것이 똑같아.


사모님은 부군이신 원로목사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세요?

내 생각엔 그래. 시대 시대마다 사도 바울 같은 선지자가 나타났듯이 그런 분 중의 하나가 아닌가.



두 분이 다투신 적도 있으세요?

많이 다투고 살았어. 나는 성격이 좋아서 싸울 일이 없는데 당신이...(웃음)


아드님들한테는 어떤 아버지셨어요?

아들들한테도 엄하지. 그렇게 또닥거리고 사랑해주는 걸 못 봤어. 늘 “뜻, 뜻을 위해서는 이러고 저러고” 하시지. 어떨 때는 뜻이 대체 뭐길래 싶은 때도 있었지.


아드님들한테 무엇을 제일 강조하셨어요?

잘 믿으라고 강요는 안 하셔. 아버지를 보고 따라오게 하는 거지. 교회 가라고 재촉 안했고, 나보고도 마찬가지였고. 그저 말씀 순종하고 따라오기를 기대하는 거지, 강요하시지는 않았어. 우린 그냥 보고 따라간 거지. 참 편하게 해줬어, 신앙생활은.


아드님들은 아버님을 어떻게 대했나요?

그 애들은 정말 아버지를 믿었지. 지금까지도 그렇고. 일부러 시키지 않아도 보고 배우는 게 있으니까. 집에 성도들이 맨날 모여서 성경공부들 하고 그러니까 보고 듣는 것이 다 그랬지. 같이 앉혀놓고 공부를 시키지는 않아도 서당개 3년이라고 들어서 알고, 봐서 알고.


아드님들이 불만이 있거나 말썽 부리진 않았나요?

글쎄, 불만 그런 건 못 들었는데... 말썽이 어디 있어, 아버지 앞에서. 꼼짝 못하고 살았지. 그런데 애들이 어느 정도 커서 중학교 쯤 가고 사춘기가 오니까 아버지가 그 때부터는 잘 해주시더라고.



세 아드님 결혼시키실 때는 어떠셨어요?

다 아버지 맘대로야. 내가 따라가 줘야지. 이러쿵저러쿵 해봐야 내가 이기지도 못하고. 아버지 하자는 대로 따라 한 거야. 그러니 편하잖아.


지금 생각해보니까 며느리 잘 얻었다 생각이 드세요?

잘 얻었지. 내가 어디 가서 고른들 더 잘 고를 수는 없지.


결국 말씀대로 하니까 다 잘 됐군요.

그럼. 편하지, 편하고.


원로목사님이 손자 손녀들에게는 살갑게 하셨어요?

우리 야베스(장손) 이뻐하는 것 같았는데... 그렇게 애들한테 잔 정 없어. 다른 할아버지들 같으면 업어주고 안아주고 할 텐데, 이 할아버지, 한번 이렇게 안아서 뽀뽀하면 그것이 끝이야.


맏손녀한테 뽀뽀하시는 사진도 있던데...

글쎄, 어쨌든 그게 끝이야(웃음).




가족 나들이도 가신 적 없어요?

그 때는 고궁 가는 게 여행 가는 거지. 애들 데리고 고궁이나 가고 그랬어. 창경원이니 이런데로. 그것도 데려다 놓고 목사님은 가셔. (웃음) 목사님은 어디 가도 먼저 교인들이지, 식구가 아냐.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다 성도들이지, 가족이 아냐.


그런 목사님이 또 어디 있겠어요.

그런 사람 둘만 되도 안 되지. 하나여야지. 하나로 족해.


그런 사모님도 한 분 밖에 없겠죠.

이렇게 산 사람도 나밖에 없다고 봐야지.


만약에 젊은 시절로 돌아가서 원로목사님과 결혼하라면 하시겠어요?

아니. (웃음) 몰라서 했지.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럼.


신앙생활도 모르니까 그냥 인도하시는 대로 하다 보면 되는 거지 알고서는 못 하는 것 같아요.

그럼. 못하지. 내가 아는데 누구한테 뭘 배워. 모르니까 배우지.


원로목사님의 일상생활에서 특별한 습관은 없었습니까?

그런 건 없어요. 환경대로 잘 살아줬어요.


잠은 얼마나 주무셨어요?

참, 잠이 없는 분이야. 밤 12시, 1시까지 성경공부시키고. 여운초 목사님 같은 분들이 우리 집에서 숙식하면서 성경 공부를 했으니까.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하셨어요?

입이 좀 짧지만 잡숫기는 다 잡숴. 많이 잡수시질 않았지. 또 집에 성경공부하는 식구들이 늘 버글거리고 나한테 돈도 많이 갖다 주지 못 하니까 반찬을 많이 하지도 못했지. 우리 목사님은 찌개 하나만 맛있어도 반찬 투정은 없어. 찌개는 생선찌개 좋아하셨어. 비리지 않은 생선, 대구나 동태 같은 걸로. 고기는 즐겨 드시지 않았어. 우리야 뭐 없으니까 맨날 된장찌개나 해 먹고 그랬지 뭐.


원로목사님께서 쓰신 구속사 시리즈 육필 원고를 보셨나요?

집에 갖다는 놨지만 함부로 열지 못했지. 혹시 잘못 될까봐. 집에 쌓아 놨었지.


집에서도 책을 쓰시곤 했나요?

입식 책상 앞에 앉으셔서 항상 성경 들여다보고 뭘 쓰시는데, 뭘 쓰는지 내가 몰랐지. 나중에 사람들한테 왜 책 안 내느냐 소리도 많이 들었어. 그래도 안 내시대. 그렇게 안 내더니 갑자기 몇 년 만에 9권 나왔잖아. 그러니까 그게 젊어서부터 다 쓰시던 거야. 책을 읽어 보니 젊어서부터 하시던 설교가 그대로 실렸어.


원로목사님을 가까이서 보시면서 눈물겨울 때나 저분이 참 저렇게 힘들게 하시는구나 싶은 때가 있었나요?

처음에 설교할 때 성대가 그렇게 안 좋았어. 설교 한 번 하면 목이 쉬고... 안타까웠지. 중년이 지나서 목이 좀 틔더라구. 그렇게 산상 기도를 많이 하시고 그랬어도, 설교를 하면 또 목이 쉬는 거 보면 성대가 너무 안 좋아서 힘들었을거야. 안타깝지.


이단 감별사 자처하는 사람들이 원로목사님 공격할때...

아이구. 그건 정말 말도 하기 싫어. 너무 힘들었어.


원로목사님께서 치아가 다 빠질 정도로 고통 받으셨다고 했는데.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그 사람이 미국까지 쫓아와서... 정말 끔찍했어. 교회에 말을 퍼뜨리고 돌아가는데 정말 질렸어. 차도 포드에서 나온 제일 싸구려, 부서져도 괜찮은 차를 타고 다녔는데 그걸 와서 몰래 찍어다가 ‘이렇게 좋은 차 타고 다닌다’고 선전을 했어. 굉장히 힘든 세월을 보냈지.


그런 일을 겪으면 원로목사님께서도 사모님한테는 그 사람들 욕을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글쎄, 나 듣는 데서는 그러시는 걸 못 봤어. 모르지. 다른 사람한테는 하셨는지... 안 그랬을 것 같애. 목사님이 그렇게 남하고 싸우는 스타일은 못 돼.


싸우시는 걸 보신 적이 한 번도 없나요?

나 못 봤어. 남 하고 싸우는 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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