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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평안♥천하보다 소중한 당신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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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글쓴이 : 관리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예레미야 21:8

 

“너는 또 이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렘 21:8)

 

시드기야 왕권은 유다의 왕권 정치로는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시드기야 집권 당시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 선지자가 있었는데 왜 시드기야 왕권이 기어이 망하고 말았습니까? 결단코 멸망을 피할 길은 없었겠습니까? 대한민국 백성이라면 기도하는 가운데 한번은 생각해 보아야만 하겠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이 마지막 왕권이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렘 21:3-7).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도둑질하는 시드기야 왕권은 망한다”(렘 21:3-7).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다”(렘 21:8).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유가 없습니까? 하나님이 용서도 없습니까? 눈물도 없고 무자비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용서해 주마”, “나는 여유가 있다”, “끝까지 참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때문에 ‘사망의 길’만 두지 않고 ‘생명의 길’도 두신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 선악과를 두어 이것을 ‘먹으면 죽고’, ‘먹지 않으면 산다’고 살 길과 그 표준을 대어 주신 것처럼(창 2:17) 시드기야 왕과 그 신하와 백성에게도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뚜렷이 대어 주었던 것입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만 하면 무조건 용서해 주겠다”며 ‘생명의 길’도 있다고 말씀할 때, 생각하는 백성이라면 ‘하나님은 여유가 있구나. 용서가 있구나’ 하고 발등에 불똥 떨어지기 전에 깨닫고 영원한 생명의 길에 서기 위하여 애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생명의 길을 걷고 있는지, 사망의 길을 걷고 있는지 스스로가 알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자유의지 속에서 마음대로 삶과 죽음을 택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안전하다, 평안하다” 할 때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열어 둡니다. 지(知),정(情),의(意)가 있고 좀 생각하는 백성이라면 만물이 ‘피곤하다’ 소리치고, 사람의 입들마다‘못 살겠다’ 아우성치고 얼굴과 얼굴마다 피곤이가득한 것을 보면서 ‘무엇인가 오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없습니까?

 

양심이 증거합니다

‘미래의 천국’을 사모하는 분들이 많지만 ‘현실의 천국’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미래의 천국’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죽어서 천당’이 아닙니다.


 


“옛적에 여러 부분, 여러 모양으로 역대 선지,선열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하신”(히 1:1-3) 말씀 자체가 우리의 생명의 길인데, 그 말씀대로 우리가 지금 달리고 있습니까? 현실(현재)을 잘 가져야만 미래는 내 것이 됩니다. 태초의 말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진정한 ‘오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현재’(오늘)가 있습니까? 과거의 원인이 현실의 결과가 되었다면, 오늘의 원인이 반드시 미래의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욕심으로 자기 위치를 떠난 결과(창 3:6) 죽음의 길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던”(유 1:6) 것입니다. 아담,하와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줄을 알았습니다. 범죄하는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일을 도모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욕심’ 때문에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모험을 저질렀습니다. 지금도 보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사단의 유혹을 받아 막연한 소망을 가지고 ‘한 번만’, ‘한 번만’ 하다가 죽음으로 끌려가는 가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할 때에 ‘설마’ 하고 이 말씀을 무시한 유다 백성들을 보십시오. 예언을 믿지 않고 무시한 것이 범죄의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 아무리 듣기 싫어도 ‘잠깐만 들어볼까?’,’한 번만 들어볼까?’ 이렇게 마음에 바늘구멍만한 구멍만 뚫려 있다면 그러한 화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른 소리인줄 알면서도 듣지를 않고 거역한 무서운 죄! 무서운 재난의 선고를 받고 ‘죽느냐? 사느냐?’의 중대 기로에 서 있는 만큼 한번만 생각해 보았어도 하나님의 선지자를 옥에 쳐 넣는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기는 예수님도 선민(選民) 유대인들이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정통이라고 뽐내던 자들이 나서서 잡아 죽인 것입니다. 마지막 때도 교인이 교인을, 아내가 남편을, 아비가 자식을, 이렇게 가까운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 넘길 것을 주님께서 친히 말씀했습니다(눅 21:16).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의 말에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야 될 텐데 “야, 뭐 어째? 이렇게 국방이 튼튼한데 너 말 다했어?” 하며 때리고 옥에 집어넣었으니 뜻으로 볼 때 이것은 곧 하나님을 때리고 옥에 가둔 것입니다.

 

하나님은 등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멍청이가 아닙니다. 참고 참다가 하나님 한번 노하는 날이면, 땅도 덩달아서 가만히 있지 않고 요동하는 화를 우리는 면치 못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잡아 옥에 가둔 자는 교회 살림을 맡아보는 유사장(有司長) 바스훌이었습니다(렘 20:2). 하나님의 사람이 말씀할 때 “내가 어찌 하오리까, 살 길이 무엇입니까?” 했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그냥 가겠습니까? “이렇게 이렇게 하시오” 하고 생명의 길을 대주지 않겠습니까? 여호와의 집 유사장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무수히 때리고 짓이겨서 착고를 채웠습니다. 예레미야의 아버지도 제사장이었는데 자기 아들 예레미야를 정신병자 취급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기 백성에게 미칠 재난을 보기 때문에 눈물이 흘러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렘 9:1) 하고 탄식했습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애곡하는데 우리의 눈이 왜 이렇게 맨송맨송합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출옥하자 마자 또 외칩니다. “회개 안 하면 이 나라는 망한다. 도시도 촌락도 다 망한다”(렘 19:15). 이것이 죄가 되어 또 옥에 갇힙니다. 마지막에는 예루살렘 성중에 물과 떡이 다 떨어질 때까지 토굴 옥에도 감금했습니다(렘 38:6-9). 말씀받은 하나님의 사람, 신세가 왜 이렇게 기박합니까?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렇게 됐다면 오늘도 “이렇게 이렇게 된다”고 바른 소리하면 오늘은 더할 것 아닙니까? 옛날 시드기야 왕 때만 무섭고 악한 때입니까? 현재는 어떻습니까? 과거는 악하고 오늘날은 선합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스훌에게 매를 맞으면서 그 순간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 외칩니다. “바스훌아, 이제부터 네 이름은 마골밋사빕이다”(렘 20:3). ‘마골밋사빕’은 사방에서 두려움이 몰려온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들은 바스훌은 발끈 성이 났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바스훌은 이미 마골밋사빔이 된 것입니다. 받은 이름 그대로 아무데서도 위로를 찾을 길 없었고(렘 20:4) 사방에서 두려움이 욱여싸오는 온갖 쓰린 괴로움, 무릎마디가 녹는 떨림 속에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양심의 가책 되는 일을 행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여기가 바로 죽음과 지옥의 반영입니다. ‘마골밋사빕’을 바스훌 개인으로 보면 안 됩니다. 바스훌 하나가 나라 전체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깃들은 현실(오늘)은 미래를 가르쳐 줍니다. 생명을 받은 사람은 평안이 마음에 깃들이고 있는 것인데, 여러분은 지금 어느 편에 속해 있습니까? 자기가 탄 기차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자기 자신은 알 것입니다. 공연히 놀라고 두려움이 오지는 않습니까? 상대방을 공연히 의심하고 마음의 괴로움을 자취하지는 않습니까? 바스훌을 보십시오. ‘마골밋사빕’! 무서운 경고를 받은 그 마음은 분명히 지옥이 아닙니까? 얼마나 괴로워했겠습니까?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거하는 모든 자가 포로 되어 옮기우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네가 거짓을 하여 들린 네 모든 친구가 일반이라”(렘 20:6). 이처럼 무서운 저주와 예고를 받은 바스훌의 두려움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이렇게 양심에 가책되는 씨를 뿌려 놓으면 그 씨가 수백 배가 되어 사망과 두려움으로 거두어집니다. 양심에 거리낌없이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생명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이러한 소명감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에겐 양심의 가책 받을 일 없습니다.

 

우리 앞에도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24)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생명을 딱 떼어내 놓고 사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생명의 길이 있을 뿐입니다.



예언을 들으면 삽니다

6·25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재물 많은 사람들이 많이 사로잡혀 갔습니다. 공산군이 밀려 나오는데 정부에서는 자신들은 도망치면서 “괜찮다, 괜찮다” 백성들을 속였기 때문에 정부를 믿고 있던 백성들은 북으로 끌려가고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희생되었습니까? 그때도 “국민이여 안심하라, 평안하다. 평안하다” 했던 예고를 믿던 사람은 멸망을 당했고(렘 23:17, 21:13-14) “아니다! 환난이다!” 하던 자들의 경고를 들었던 사람들은 살아났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백성의 앞날을 예언할 때 친구들, 가까운 사람들까지도 어서 예레미야가 타락하기를 바랐습니다(렘 20:10). 당시 제사장들, 백성들은 모두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렘 23:17)하고 우기고 있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의 기를 꺾으려 했습니까? (롬 8:30-39, 신 28:7, 출 23:22-27, 레 26:7-8, 신 32:30, 수 23:10, 사 30:17, 삼하 22:38-41, 시 18:37-40)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망합니다. “믿는 성도에게 저주하는 자 저주를 받고, 축복하는 자 축복을 받으리라”(창 27:29) 하심 같이 하나님의 사람을 모욕하고 저주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입니다. 반드시 자기가 당하고 맙니다. 믿음으로 눈을 떠서 지금 이 시대의 선각자 입장에서 파수꾼이 되어 앞을 내다보고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지구 땅덩어리 곳곳마다 하는 짓들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가운데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멍청이가 아닙니다. 한번 하나님이 노하는 날, 하늘과 땅에 맞닿아서 이 땅의 모든 죄악을 맷돌질하는 날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노아 때는 물로 맷돌질했습니다. 롯의 때에는 불로 맷돌질했습니다. 끝날은 노아 때 같고 롯의 때와 같다고 했습니다(눅 17:26-30). 그렇다면 끝날에도 반드시 맷돌질 안 하겠습니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 선지자는 어디까지나 깨끗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받아 나라와 민족을 살리려 했던 것밖에 없었습니다. 점점 더 미움을 받았습니다. 오죽했으면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다가 또 “그리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했겠습니까? 울면서 전하는 말씀(렘 25:4, 7, 13, 렘 29:19)을 들으십시오. 받은 말씀 의심 없이 믿어지고 그대로 될 줄 알았기에 동족이 망하는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해서 칼로 배를 쑤시듯 하는 아픔 때문에 엉엉 울고 있는 것 아닙니까? 깨달아 돌이키는 자는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나라와 민족을 살려 보겠다고 안타깝게, 애절하게 간구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예언을 안 들으면 망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과 예고를 들은 시드기야 왕은 사신을 보내어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언의 말씀을 알기 위해 부복한 것이 아니고 믿는 척해서 예레미야의 속을 떠보려는 심사에서 응답받은 내용을 물었던 것입니다. 시드기야가 조정 백관에게 명해서 전 백성에게 “무릎 꿇고 회개하라” 했으면 생명의 길이 그 앞에 쫙 열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드기야 왕의 기도를 부탁받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노와 분과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내가 또 이 성에 거주하는 자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그 후에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과 백성과 및 이 성읍에서 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그 대적의 손과 그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렘 21:1-7). “왕이여, 왕이 잡혀서 바벨론 왕의 눈과 당신의 눈이 마주치고, 그의 입과 당신의 입이 마주쳐 얘기할 것이며, 당신의 눈알이 뽑힐 것이며, 눈알 빼기 전에 두 아들을 당신 눈 앞에서 목을 쳐 죽일 것이요”(렘 32:1-5, 왕하 25:1-7) 그러자 시드기야 왕은 “옥에 가두라” 명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시위대 뜰에 갇혀 있으면서도(렘 38:28) 여전히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 예언했습니다(렘 33:1-5).


 

당시 그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고, 세상 향락을 즐겼고, 뇌물을 좋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복을 빌어 달라는 시드기야 왕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는 진심으로 “항복하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70년 동안 포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채찍이니 달게 받고 엎드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렘 29:7-10). 그러나 예언의 말씀을 듣지 않고 믿지 않은 시드기야 왕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또 그가 자비와 긍휼로 백성을 다스리지 못한 죄로 말미암아 유다 백성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더라”(왕하 25:7)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다 불사름을 당해 황무하게 되었고 빈천한 자만 남겨두고 다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왕하 25:12).

 

마지막 때에도 한 민족이 북방에서 나와 다른 민족을 진멸하고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렘 6:22-23). 북쪽에서 온다면 오는 겁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오는 장소까지 일러주며 채찍을 가하는 말씀을 줘도 인간은 제 욕심대로, 제 속편한 대로만 믿으려 합니다. 옛날 얘기가 아닙니다. 채찍을 주어도 깨닫지 못하면 버리시고, 반성하고 회개하는 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주십니다(렘 26:13, 렘 7:3). 언어와 피가 같은 우리나라도 마음만 하나되면 살 길이 열립니다. 우리는 깨닫고, 묵은 땅을 기경합시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의(義)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자가 없으리라. 너희는 유다에 선포하며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하며, 또 크게 외쳐 이르기를 너희는 모이라, 우리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 하고, 시온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 내가 북방에서 재앙과 큰 멸망으로 이르게 할 것임이니라”(렘 4:3-6).

 

보십시오. 이 말씀은 과거의 역사가 아닙니다. 오늘 대한민국 백성을 향하여 안타깝게 부르짖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백성에게 시드기야 왕에게 임한 재난이 임하지 않기를 우리는 기도합시다. 민족적 회개가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우상을 섬겼든지 이제는 다 파괴해 버리고 회개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자그마치 여섯 번씩 “돌아오라!” “돌아오라!” 말씀하셨습니다. 경제 파탄, 세월이 험악해지는 것, 일거리 없는 것, 흉년, 이 모든 것이 다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권고임을 깨달읍시다(암 4:6-13).

 

우리는 이제 죄악을 솔직히 고백합시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안타깝게 권고할 때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고 이 나라 민족 위해 기도합시다(렘 29:12-14).

 

1980년 3월 17-18일 특별집회 박윤식 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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